close up of heart shape
Essay

당연한 것들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내 인생에서 최초로 감사했던 일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일이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아직도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 내가 5살 때 유치원에서 추수감사절 파티를 한 적이 있었다. 파티를 즐기고 끝마칠때쯤에 선생님들이 원생들 수에 맞춰서 준비한 선물 보따리를 받고서 기뻐했었다. 아마도 의례적으로 선생님들께 고맙다고 인사도 했던거 같다. 하원시간이 되고 그 선물 보따리를 힘겹게 챙겨서 집으로 걸어 가는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산도 챙겨오지 않아서 비를 쫄딱 맞으면서 걸어가는데 그만 봉투가 찢어져서 선물들이 쏟아진 것이다. 나는 당황했고 비를 맞으며 쪼그려 앉아서 선물들을 품속으로 챙겨봤지만 내 작은 손과 팔로는 전부 챙기기에는 역부족이였다.

그러던중, 낯선 아저씨가 내 쪽으로 다가 오더니 말 없이 땅에 떨어진 내 선물들을 줍고서는 내가 힘겹게 들고 있던 보따리도 함께 들어주셨다. 그 순간에는 나를 도와 주시려고 했던 그 아저씨의 의도는 잘 모르고 “그거 내껀데…”라며 중얼거렸던게 기억난다. 같이 걸으며 아저씨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내가 살던 빌라 옆집 아저씨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평소에 무뚝뚝하고 무섭다고 생각한 아저씨여서 인사도 안하고 피해 다녔는데 나를 도와주셨던 거다. 그 아저씨는 어떤 마음으로 나를 도와주셨던걸까?

함께 비를 맞으며 집까지 걸어왔고, 아저씨는 아무말 없이 내 손에 선물들을 다시 쥐어주셨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그 아저씨께 고맙다고 인사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에도 아저씨를 마주칠 일이 한 두번쯤은 있었던거 같은데 나는 왜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지 않았을까? 어린아이라서 그런 예의는 잘 몰랐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감사 인사를 하지 않은것에 대해서 후회감이 든다. 비록 당시에 그 아저씨께 감사하다고 말은 못 전했지만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날 그 아저씨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

이게 내가 사람에게 처음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었던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거지만 이 때 처음으로 사람과 사람은 서로 돕는다 라는 걸 알게 됐다. 또 그 때 전하지 못한 감사의 마음이 아직도 트라우마 아닌 트라우마가 됐고 누군가로부터 받은 친절에 대해서는 바로 고맙다고 표현해야 마음이 편한걸 보면 어린 시절의 이 경험은 아마도 내 인생관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거라고 생각한다.

동물에게 감사한 마음

생각해보니 사람 뿐만 아니라 동물들한테도 고마운일이 있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댁에서 어른들에게 장난을 치다가 부모님께 크게 혼나고, 마당으로 뛰쳐 나간적이 있었다. 마당에는 할머니가 기르던 강아지 백구가 있었는데 그 녀석을 보니까 참고 있던 울음이 터졌고, 그대로 달려가서 백구를 내 품에 껴안고서 울었다. 평소에는 만질려고 가까이 가면 앞발을 들어올리고 꼬리를 흔들면서 온갖 난리를 피우는 통에 그 녀석 근처에는 잘 안갔었다. 그런데 그 날 만큼은 자기 몸에 내 눈물, 콧물이 범벅되어 다 묻어 나도록 가만히 있어주었다. 지금은 백구 나름대로 나를 위로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을까? 이 포스팅에 전부 쓰지도 못할 만큼 많으며, 아쉽게도 전부 기억하지도 못한다. 또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고마운것들 보다 피해를 당한 기억들이 더 쉽게 떠 오른다. 어쩌면 그래야만 더 잘 생존할 수 있었던 인간의 본능일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현시대의 인간은, 특히나 한국사회에서 생존 위협이 크게 줄어들었고 그로 인해 마음은 척박해지고 정신은 나도 모르게 더 긴장 상태에 놓이게 되는게 아닐까 싶다.

정말 당연한 것들인가?

내가 지금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세상 어디의 누군가는 누리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숨을 쉬고 있는데 누군가는 폐에 병이 있어서 산소호흡기가 아니면 제대로 숨도 못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모니터를 보면서 글을 쓰거나 영화를 볼 수 있지만 누군가는 앞이 보이지 않아서 점자책을 보고 있을 수 있다.
나는 말을 할수 있지만 누군가는 말을 하지 못할 수 있다.
나는 소리를 들을수 있지만 누군가는 보청기 없이 소리를 듣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걸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걷지 못할 수도 있다.
나는 지금 앉아 있는데 누군가는 신체가 불편해서 누워 있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지금 밥을 먹고 맛을 느끼며 감탄도 하고 불평도 하지만 누군가는 먹을 것이 없어서 하루하루 굶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나는 가족이 있지만 누군가는 가족이 없을수도 있다.
나는 어리광 부리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는 가족들이 있지만 누군가는 가족이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친구가 있지만 누군가는 친구가 없을 수도 있다.


나는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것에 대해서 좁다느니, 내 집이 아니라면서 불평을 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비를 피하고 편하게 잠 잘수 있는 공간이 절실할 수 있다.
나는 일을 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일을 할 수조차 없을 수 있다.
나는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병원에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감사함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

이 밖에도 더 많지만 이 글을 쓰면서 내가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라는걸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나는 고마운것들 보다는 내게 부족하고 필요한것들에 대해서 집중했고 그것들을 어떻게 하면 채울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만큼 채워지지 않으면 불안해 하기도 하고, 속에서 짜증도 올라왔다. “나는 왜 그것들을 가질수 없나? 왜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까? 돈을 더 많이 모으고 싶은데 왜 내 뜻대로 안될까?” 등등 내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나름 노력도 했는데 잘 되지 않는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내게는 없는것들 즉, 결핍된 것들에 의식을 모을수록 내 마음이 더 피폐해짐을 느낀다. 그렇다고 결핍에 대한 인식이 꼭 나쁜것만은 아니다. 이런 결핍한 감정이 때로는 삶의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오로지 결핍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안좋다. 그 이유는 내가 가진 것들을 잃었을 때도 그 결핍이라는 부정적인 마음은 더 나를 괴롭게 하고 더욱 커진다.

잊지 말고 항상 깨닫자

진부한 결론이지만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에 감사함을 더 집중하면 나의 심신 건강에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내 삶은 내 생각보다 불평할 것들, 불만족스러운 것들, 원망할 것들 보다, 감사한 것들에 의해서 쌓아올려져 왔고 지탱되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 한켠에 새겨둘 작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감사일기라는 것을 써보는 것도 좋을거 같다. 그리고 내 삶의 대부분을 결핍된 것들에 대해 생각하면서 아쉬운 마음으로 살고 싶지 않다.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마음이 더 편하고 내게 힘을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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